2000년 12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하 여성국제법정)' 현장. 일왕 히로히토와 일본 정부 그리고 전범 9명에게 유죄가 선고되자 방청석에선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남북한 위안부 피해자들은 서로 손을 잡고 기뻐했다. 중국·대만·인도네시아 등 8개 아시아 국가에서 온 70여명의 위안부 피해자들은 재판관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세계 인권·여성단체들와 검사단들도 기쁨의 포옹을 나눴다. 전후 55년 만에 위안부 문제가 국가의 범죄임을 지적하고, 국가원수이자 군 최고 책임자인 일왕 히로히토의 형사책임을 촉구한 판결이었다.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세계 시민 사회의 양심으로 내린 심판이라는 점에서 뜻깊고 감동적이었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세계 시민재판 성격을 지닌 여성국제법정이 열렸던 건 위안부 문제 해결이 우리나라만의 숙원은 아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은 아시아·태평양 국가 각지의 점령지와 식민지에서 여성들을 위안부로 동원했다. 한국, 중국, 일본,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동티모르, 말레이시아, 타이, 괌, 미얀마, 베트남 등 일본군이 주둔했던 지역의 여성들과 인도네시아에 거주했던 네덜란드 여성들이 그 대상이었다.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 수는 약 1000명. 우리나라에서 피해자들의 이름 뒤에 '할머니'를 붙이듯 필리핀에서는 이름 앞에 '로라(Lola)'를 넣는다. 고(故) 마리아 로사 헨슨(1927~1997)은 우리나라의 김학순 할머니 같은 존재다. 1991년 8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등이 주최한 '제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가 서울에서 열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필리핀에서 처음으로 위안부 피해자임을 밝혔다. 그의 뒤를 이어 200여명의 로라들이 피해 신고를 했다.
대만에서 할머니를 뜻하는 말은 '아마(Ah Ma)'다. 2차 대전 당시 대만에서 위안부로 강제 동원된 아마는 2000여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14세부터 30세 사이의 여성들이 전장으로 끌려갔으며 농부, 어부, 행상인 등 주로 가난한 집안의 딸들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밝혀졌다. 1992년 설립된 '타이베이 여성구호재단'에 총 58명의 아마가 피해자 등록을 했지만, 2005년 30명으로 줄었고, 현재 생존자는 5명뿐이다.
1992년 5월 북한에서도 피해조사위원회가 발족됐다.
한국 다음으로 위안부 피해자가 많은 것으로 알려진 중국도 정부에 등록된 생존자 수는 23명뿐이다. 중국에서 위안부 문제를 인권문제로서 취급하는 여성 운동의 움직임은 보기 힘들지만, 재판을 통해 싸우는 민간 투쟁이나 자료 조사, 피해자 증언집 출간 등이 계속되고 있다. 그 외에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등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협정을 비롯해 양국 간의 배상협정이 체결돼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