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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명의 생존 위안부 피해 할머니 중 가장 늦게 피해자 신고를 한 경북의 박○○(92) 할머니는 지난달 공식 피해자로 최종 등록됐다. 박 할머니가 피해자 등록을 정부에 신고한 것은 지난해 10월. 10개월의 심사 끝에 현재까지 마지막 피해자로 등록된 것이다. 피해자 추가 등록은 지난해 1월 이○○ 할머니 이후 1년7개월 만이다. 치매기가 있어 진술이 정확치 않았으나 할머니 동생의 진술이 신뢰도를 높였다는 후문이다. 치매가 심각해 남자조카만 알아볼 정도다. 신변 노출을 극히 꺼려하는 박 할머니는 현재 한 요양병원에서 돌봄을 받고 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할머니는 텔레비전에서 '위안부' 이야기가 나오면 눈을 감고 입을 닫는다고 한다.
1922년에 태어난 하○○(92)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구체적인 시기와 방법, 피해 기간 등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일본에 있는 언니 집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 어머니가 보고싶어 울었더니 한 아주머니가 '한국에 데려다주겠다'며 데려간 곳이 일본의 한 공장이었다고 한다. 하 할머니는 이곳을 거쳐 위안부로 강제 동원됐다. 야전병원에서 간호와 잡일을 하기도 했다. 하 할머니는 현재 서울 강서구에 거주하며 아들 내외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하 할머니는 살고 있는 곳 인근 경로당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화투를 치며 하루를 보낸다.
함○○(82) 할머니는 12세인 1944년 7월에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됐다. 서울 창신국민학교에 다녔던 할머니. 6학년 초에 강당에서 일본 홍보영화를 관람한 뒤 일본에 가고 싶은 사람은 지원하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담임선생이 집안 환경이 어려운 함 할머니에게 지원을 권유했다. 이때 5~6명 정도가 '근로정신대' 명목으로 차출됐다. 위안부 피해 기간과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 서울 노원구에 거주 중인 함 할머니는 82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동안의 외모를 자랑한다. 외모만큼 젊게 사는 함 할머니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영화를 보러 다니기도 한다. "남들을 돕고 살아야한다"는 함 할머니는 교회 목사님의 권유로 지난해에 시신기증을 결정하기도 했다.
전라남도 화순이 고향인 황선순(88) 할머니는 19세쯤에 공장에 소개시켜 준다는 말에 속아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됐다. 현재 황 할머니는 고향에서 아들 내외와 남은 생을 보내고 있다. 방 한 켠에는 대상포진과 빈혈, 신장, 심장 관련 약이 가득 쌓여있다. 점점 노쇠해져가는 황 할머니는 "살아있는 동안 일본정부가 사죄하는 것을 보고 싶다"거나 "그래 그 일본놈들은 언제 사과를 하나" 등의 말을 자주한다. 아들이 잠시 밖에 나가려고 하면 '우리 집' 찾아간다며 밖으로 나가는 통에 할머니 곁에서 꼼짝을 못한다고 한다. 초기 치매가 의심되는 상황에서도 할머니는 여전히 당시 타고 갔던 일본군의 배와 비행기 이름을 정확하게 얘기할 만큼 그날의 기억만큼은 또렷하다고 한다.
1926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최○○ 할머니는 대만의 맥주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말에 속아 위안부가 됐다. 현재 할머니는 5만원짜리 지폐를 보면 "내 때는 돈에 여자 그림(신사임당 초상)이 없었다"면서 쓰레기통에 돈을 버릴 만큼 치매가 심하다.
할머니의 남편은 큰아들이 21세 되던 해 세상을 떴다. 남편과 사별한 후 할머니는 방 두칸에 부엌 딸린 집에서 두 아들과 함께 산다. 할머니는 당뇨를 앓고 있어 인슐린 주사를 주기적으로 맞고 관절약, 진통제, 영양제 등을 수시로 복용하고 있다. 눈도 침침해 얼마 전 혼자 발톱을 깎다가 생살을 도려내기도 했다.
할머니는 적적할 때 집앞 평상에 나가 앉는다. "늙고 병들면 못 논다카더니 이 모양 이 꼬라지 되고 보니 인자는 데리러 오는 사람도 내한테 놀러오는 사람도 없다." 가족 때문에 감히 세상에 선뜻 나서지 못하지만 또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할머니다. "건강하게 잘 지내라잉. 그리고는 꼭 다시 와서 통도사에 데려가." 7월27일 기자와 헤어지면서 할머니는 나직이 말했다.
1928년 충남 서산 출생인 하상숙 할머니가 중국에 취업 사기에 속은 건 16살 때였다. 할머니는 중국 적경리(積慶里)에서 기미코라는 이름으로 위안부 생활을 했다. 쇠창살로 둘러싸인 위안소에서 할머니는 하루 많게는 15명의 일본군인들을 상대했다. 군의관이 설명한 '아이를 못 갖게 하는 주사'도 수시로 맞았다. 해방 후 위안소가 있던 곳에 버려져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현재 중국 우한(武漢)에 정착해 살고 있다.
중국 실태조사 때 할머니를 만난 정신대연구소 관계자에 따르면 하 할머니는 1950년대 말 우한 지역의 조선인들 모임을 이끌었고 위안부 피해자 명단을을 비롯해 여러 문서를 작성해 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만난 중국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소원은 두 가지였다고. 첫째는 조국 방문, 둘째는 우리 노래의 카세트를 갖고 싶다는 것. "죽을 때는 고향에서 죽어야 하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할머니는 지난해 8월14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집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하○○ 할머니의 증언집은 따로 없어서 정확한 동원시기나 장소는 확인하기 어렵다는 것이 시민단체 관계자의 말이다. 하 할머니는 충남 서산의 한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다. 근처에 딸이 살고 있어 이틀에 한 번씩 할머니를 찾아뵙는다고. 당뇨를 앓고 있는 할머니는 지난해 보름 가까이 병원신세를 지기도 했다. '3년 전에 당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바보가 다 되었다'고 속상해 하는 하 할머니. 저혈압과 갑상선 기능 저하증으로 온전한 대화를 이어나가기도 어렵다.
지난 4월 시민단체 관계자들과 함께한 나들이에서 할머니는 막걸리를 마시면서 "예전에 우리가 그곳(위안소)에 갔을 때 매일 울고 있으니까 군대에서 보급으로 나온 술을 줬다"며 "그때 술을 배웠다"고 말했다. 이렇게 막걸리 한 잔에도 위안소의 기억은 끈질기게 달라붙는다. 사진을 찍고 호박엿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작별 시간이 다가오자 다른 할머니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3년 만의 짧은 만남에 이별이 아쉬워서였다.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 다시 만나자."
최갑순 할머니는 1919년 전라남도 구례에서 태어나 14살 때 중국 둥안성(東安省)에 있는 위안소로 끌려가 해방이 될 때까지 12여년간 고초를 겪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장사를 시작했다. 최 할머니는 구례에서 농사를 짓고 양아들을 키우며 생계를 이어갔다. 마흔이 넘어 결혼을 한 후 뒤늦게 서울에 살림을 차렸다. 20여년 전 남편은 먼저 세상을 떴다. 할머니는 서울의 한 노인전문병원에 입원한 지 3년이 넘었다. 2012년 초 양아들마저 운명을 달리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는 아들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잊었다. 이제는 눈과 귀도 나빠지고, 말할 기운마저 성치 않은 상태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이전보다 살이 너무 빠진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안쓰러워하고 있다.
1925년생인 최○○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를 겪은 후 아이를 낳지 못해 양딸을 입양해 키웠다. 2003년에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한 최 할머니는 "남부끄러워 죽을 때까지 얘기하지 않으려 했는데…"라며 정대협에 증언을 했다고 한다. 최 할머니는 수원의 임대아파트에서 혼자 살다가 10년 전부터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경기 용인의 한 병원에서 일반병실과 중환자실을 오가며 자신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다. 노래를 잘해 동요 '나비야'를 즐겨 불렀던 할머니는 이제 목에 가래가 껴 전처럼 예쁜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치매 탓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면회를 오면 연신 "예쁘다, 예쁘다"고 말하는 최 할머니다. 다행히 딸이 곁에서 할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있다.
1922년생인 최○○ 할머니는 서울의 한 요양병원에서 지낸다. 할머니는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소고기를 꼽는다. 하지만 이가 많이 빠져 잘 씹지를 못해 소화기능이 약해지고 말았다. 이런 할머니를 위해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틀니를 하자고 권유해도 "얼마 안 있으면 죽을 텐데 뭘 하느냐"고 사양한다고. 위안부 운동 상황과 일본 정부의 태도에 대해 설명하니 그저 짧게 대답하면서 먼 곳만 바라봤다고 한다. 할머니는 무릎도 좋지 않고 손을 많이 떤다. 가족이 있지만 자주 찾아오기 힘들어 할머니는 요양병원 생활이 늘 외로운 듯하다. 활동가들과 작별인사를 하면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며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고. 활동가들은 한목소리로 "할머니는 손도 곱고, 피부도 하얘 웃는 모습이 소녀처럼 참 보기 좋다"고 말한다.
이효순(89) 할머니는 17살 때 경남 의령의 한 빨래터에서 끌려갔다. 트럭에 올라타고 보니 또래 3명이 이미 붙잡혀 있었다. 위안소에서 4년을 보내고 해방이 된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결혼 후 경남 합천에서 살다가 남편이 세상을 뜬 뒤부터 혼자 지냈다.
현재 이 할머니는 여동생의 보호를 받으며 창원의 한 노인전문병원에 입원 중이다. 코에 산소공급기를 끼고 생활하는 할머니는 간간이 수혈까지 받아야 할 정도로 몸이 쇠약해진 상태다. 지난달 14일 만난 이 할머니는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죄ㆍ배상하지 않는 점에 대해 "즈그들 뺏기기 싫으니까 그렇지"라고 답했다. 할머니의 오빠도 일본군에 강제징용됐다가 희생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도 성남에 사는 임정순(85) 할머니는 간병인이 돌봐주고 있지만, 지금껏 혼자 생활한 세월이 길어서인지 가끔 TV와 현실을 혼동하는 증상을 보인다. 어느 날 할머니는 정대협 활동가들에게 "일본 사람들 여럿이 찾아와 나를 빙 둘러싸고 앉아서 '빠가야로(바보의 일본말), 네가 돈 벌고 싶어 온 거지. 우리는 강제로 데려간 적 없다'고 해서 한참을 울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오래 전부터 파킨슨병과 당뇨를 앓고 있는 할머니는 다리 상태도 좋지 않아 외출을 거의 못한다. 친딸이 있지만 할머니는 혼자 지내는 편이 낫다며 같이 살길 마다하고 있다. 그렇지만 밝은 성격에 웃음도 많은 할머니는 평소 사람들과 둘러 앉아 간식을 먹으면서 재미있게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한다.
1916년생인 정복수(98)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 가운데서 가장 나이가 많다. 경기 광주 '나눔의집'에 살고 있는 할머니들 가운데 가장 체구가 작은 그는 일명 '까칠 할머니'로 통한다. 초기 치매 증상이 있는 정 할머니는 온화한 미소를 짓다가도 기분에 따라 눈빛과 말투가 변한다. 할머니의 나이는 90살에서 멈춘 듯하다. 주변에서 할머니의 진짜 나이를 알려주면 버럭 화를 낸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예민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기자와 만난 지난 9일 정 할머니는 "사진 찍을 거면 가!"라며 지팡이를 들고 호통을 쳤다. 하지만 평소에는 나눔의집 활동가들을 살뜰히 챙기고, 학생들이 찾아오면 손주처럼 따뜻하게 대해준다고 한다.
부산이 고향인 이옥선 할머니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가지 못했다. 돈도 벌고 공부도 시켜준다던 여관 주인은 이 할머니를 식모로 부려 먹다 울산 술집으로 보냈다. 이 할머니는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에 트럭에 강제로 실려 위안부로 연행됐다.
중국 지린성(吉林省)에서 '위안부' 피해를 당한 이 할머니는 해방 후 19세에 결혼해 중국 팔도진(八道鎭)에 정착했다. 군대 간 남편이 10년 동안 돌아오지 않자 29세에 재혼해 전처의 아들 내외와 함께 살았다.
74세인 2000년 영구 귀국했지만 사망신고가 돼 있어서 다음 해에 국적을 회복했다. 2002년부터 경기 광주 나눔의집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 할머니는 지난 5일 백악관 관계자를 만나 면담을 하는 등 위안부 참상을 알리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옥선 할머니는 16세인 1943년 고향인 대구에서 중국으로 끌려가 2년여 동안 위안부 생활을 했다. 해방 직전 중국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피신을 했다가 유엔(UN)군의 도움을 받아 신의주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왔다.
같이 끌려간 동네 친구의 생사를 알 수 없었던 이 할머니는 혼자만 살아 돌아왔다는 죄책감에 19세부터 전국을 떠돌았다. 2011년에는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2000만원을 2년 전 보은군민장학회에 기부한 것이 알려져 국민포장을 받았다.
지난해 7월부터 3달간 미국과 독일 등을 거치는 '증언 대장정'에 참여하는 등 12년째 해외 증언 활동을 하고 있다. 퇴행성 관절염과 골다공증이 심해져 최근에는 성인용 보행기와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다. 충북 보은에서 생활하던 이 할머니는 최근 경기 광주 나눔의집에 입소했다.
대구 이용수 할머니는 1928년 6남매의 고명딸로 태어났다. 부잣집 유모 생활을 하는 어머니 대신 남동생 4명을 키웠다.
16세에 원피스와 빨간 가죽구두를 보여주며 '배불리 먹여주고 집도 잘 살게 해주겠다'는 일본 남자의 말에 속아 친구와 함께 따라 나섰다. 중국을 거쳐 대만 위안소로 강제 동원됐다. 위안소의 주인은 이 할머니를 대구에서 데려간 일본인이었다. 이 주인에게 전기고문도 당했다.
할머니는 해방 후 고향에 돌아왔다. 면사포 한번 못 써본 것이 씁쓸하다는 생각에 환갑이 되던 1989년 75세의 할아버지와 결혼을 했다. 하지만 의처증이 심해 이혼했다.
명랑한 이 할머니는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 또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 참석을 위해 서울을 자주 찾을 만큼 활동적이다.
평안북도 출신인 이수단(93) 할머니는 19세 때 동네 처녀 3명과 함께 군복에 칼을 찬 일본 앞잡이에게 속아 만주로 끌려왔다. "하루에 군인 여덟에서 열 명 정도 받았어." 할머니는 일본인 부부가 운영하는 위안소에서 심신이 짓밟혔다. 가까스로 풀려났지만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1970년대 초 북한의 가족과 연락이 닿아 편지와 사진을 주고받았지만 1973년 보낸 편지가 주소불명으로 되돌아왔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빛바랜 사진 한 장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랜다.
현재 이 할머니는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서 '조선말'도 잊은 채 홀로 살아가고 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경로원에서 두 번의 머리수술, 정신분열증, 대퇴골 골절을 혼자 감당하고 있다. 최근 할머니와 만난 한 사진작가는 "인형을 안고 '아가야, 엄마는 어디로 갔니? 이제부터는 내가 엄마 할게' 하며 어르는 모습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며 근황을 전했다.
1928년 경북 영일에서 9남매의 맏이로 태어난 이○○(86) 할머니. 열두 살 때부터 포항 바닷가에서 물질을 하며 해삼ㆍ멍게를 따서 살림에 보탰다. 열다섯 살 때 방직공장에서 한 달 일하면 한국에서 1년치 일한 봉급을 받을 수 있다는 일본군의 꼬드김에 넘어가 중국으로 건너갔다. "포항에서 일곱 명이 갔는데 살아온 사람은 내 밖에 없다." 또래 위안부들과 탈출을 도모했다가 주동자로 지목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지난 6월 기자와 만난 할머니는 당시의 상황을 전하면서 윗도리를 가슴까지 끌어 올려 인두로 지져 생긴 상처를 보여줬다. "일본이 저항한 지가 70년이 됐다. 그래도 아직 내 몸에는 상처가 남아 있다. 몽둥이 맞은 자리는 삭는데 불 지진 데는 아직까정 안 낫는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된 할머니는 중국에서 1남1녀를 입양했다. 지금 한국에서 함께 살고 있는 아들은 중국에서 경찰이었다. 할머니의 영구귀국 결심에 서둘러 퇴직해 어머니와 동행했다. 며느리는 아직 중국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1918년생인 이순덕(96)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 중 최고령이다. 전북 이리가 고향인 할머니는 18세 때 위안소로 끌려가 7년 만에 풀려났다. 구타 탓에 시력이 떨어지고 군홧발에 치여 엉치뼈가 뒤틀렸다. 칼자국과 매 맞아 생긴 생채기는 할머니의 아픈 과거사의 흔적이다. 전 세계를 돌며 증언활동을 펼친 할머니는 1999년 5년5개월간의 법정투쟁을 통해 처음으로 일본법정으로부터 30만엔씩의 배상금 지급판결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결기 있게 일본정부와 맞선 할머니는 지난해 12월 척추압박골절로 병원신세를 진 데 이어 지난 6월 노환과 치매로 노인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다. 병상에 눕기 전에는 정대협이 운영하는 쉼터(평화의 집)에 머물렀다. "이대로는 도저히 눈을 감을 수가 없어. 빨리 나아야 또 일본 건너가서 싸움 한번 야무지게 할 텐데"라고 말했던 할머니는 쉼터에서 함께 생활하는 길원옥 할머니가 병실을 찾아 "나 왔어요"라고 귓가에 소곤대도 눈을 뜨지 못했다.
경상남도 산청이 고향인 이○○(91) 할머니는 17세에 강제로 대만에 끌려가 22살 때까지 5년간 위안부 생활을 겪었다. 1945년 일본의 패전 후 지옥 같은 위안소에서 나와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어머니에게 조차 그동안 겪은 일을 말하지 못했다. 이 할머니는 2003년 위안부임을 밝힌 이후 2005년부터 각종 국내외 학술대회에서 공개증언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의 참상을 밝히는 일에 힘썼다.
고관절 통증 탓에 보행은 불편하지만 아흔이 넘은 나이에 비해 정정한 편이다. 결혼을 했지만 아이를 낳을 수 없던 이 할머니는 남편의 조카를 양자로 들여 키웠다. 현재 가족과 함께 부산에 거주하며 증손녀를 돌보고 있다.
이○○(85) 할머니의 강제 동원시기와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공개 증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공개 서류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록 시 작성한 신고서가 전부다. 이 할머니는 자신의 신분이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서울 용산에서 가족들과 살고 있는 이 할머니는 자원봉사자의 방문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해당 구청에서는 분기별로 할머니 댁을 방문하거나 전화통화를 통해 할머니의 건강 상태를 살피고 있다. 구청 관계자에 따르면 할머니는 당뇨와 관절염 등 노인성 질환을 앓고 있지만 거동하는 데 큰 문제는 없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지난번 방문 때 이 할머니가 "내가 요새 건망증이 심해. 가스에 물을 올려놓고도 깜빡깜빡해"라고 했다고 전했다.
이○○(89) 할머니는 1925년 함경남도 이원에서 태어났다. 조실부모하고 고모집에 양녀로 들어갔던 할머니는 16세 때 대만 위안소로 끌려가 고초를 겪다 해방 후 풀려났다. 위안부 피해 등록은 2001년 7월에 했는데 함께 위안소에서 생활한 또 다른 피해 할머니를 우연히 길에서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할머니는 지금도 위안소 이야기를 끄집어내면 "아유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골이 무겁다"며 입을 꾹 닫는다. 고혈압ㆍ대장염ㆍ심장병 등을 앓고 있는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 없이는 외출이 불가능하다. 치매 증상도 심해져 지난 6월 '합동생일파티'가 끝난 후 요양보호사가 집 안으로 모시자 "누군데 우리집엘 가려고 해?"라고 되묻기도 했다. 현재 할머니는 대구의 한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다.
충북 청주가 고향인 이귀녀 할머니는 1943년에 중국 위안소로 끌려가 2년간 고초를 겪었다. 해방이 되고 난 이후 중국인 남편을 만나 중국에서 함께 살았던 할머니는 60여년 동안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2012년 대한민국 국적 회복한 후에야 고국으로 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워낙 세월이 흘러 친척들을 찾긴 힘들었고, 지금은 경기도 용인의 한 요양병원에 머물고 있다. 우리말을 많이 잊어버린 할머니는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가 여의치 않다. 면회 오는 사람도 거의 없어 외로움을 많이 느끼고 있다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있다. 어릴 때 복순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할머니는 지금도 고향 얘기만 나오면 눈물을 훔친다.
1925년 태어난 이○○ 할머니는 조카 내외와 함께 살고 있다. 관절염과 허리 통증으로 거동이 힘들지만 지팡이를 짚고 동네를 산책하는 재미로 산다. 이웃들과도 정답게 지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할머니는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지난해 여성가족부 장관이 할머니 집에 찾아왔을 때도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고. 할머니의 피해 사실을 모르는 동네 사람들도 많은데, 여러 사람들이 집에 들어와서 창피했다고 전했다. 할머니는 "위안부가 무슨 죄인인 것처럼 느껴지더라"고 말했다. 최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한 '평화의 집'에 입소하려고 했지만 건강이 악화돼 포기했다. 할머니는 활동가들과 헤어져야 할 때면 대문 밖으로 나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든다.
충청남도 당진에 살고 있는 이○○ 할머니는 뒤늦게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이 됐다. 당초 본인은 등록을 원하지 않았는데, 주변 사람이 할머니 사정을 듣고 신고해줬다고 한다. 동생이 일찍 세상을 떠 그의 아들을 데려다 키웠다. 할머니는 몇 년 전 고관절 수술을 한 뒤 거동이 불편해져 보행기를 타고 이동한다. 최근에는 노환으로 시력과 청력이 크게 악화됐다. 그래도 매일 오전마다 간병인이 와서 청소와 빨래 등 집안일을 해주기 때문에 한결 낫다고 할머니는 말한다. 주변 이웃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할머니 집에 모여 말동무가 돼 주기도 한다. 활동가들이 찾아오면 TV방송을 통해 수요집회를 보고 있다면서 함께 참석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한다.
공개를 꺼리는 ○○○(86) 할머니의 정확한 동원 시기ㆍ장소는 알 수 없다. 할머니는 위안부로 끌려가면서 가족과 생이별을 했다. 할머니는 일본군한테 구타 당한 후유증 탓에 허리 통증에 시달린다. 치매 증상은 점점 더 심해져 시장에 갔다가 집을 못찾아 한참 헤맨 적도 있다. 할머니는 한탄한다. "세상을 잘 못 만나 그렇지, 요사이 태어났으면 능력 있는 여자로 살았을 텐데…"
1929년 충북 아산에서 태어난 유희남 할머니. '나눔의 집'에 살고 있는 할머니들 중 유독 언론에 얼굴이 노출되길 꺼려 카메라를 피한다. 지난 6월 배춘희 할머니의 영결식 때도 시종일관 흰 마스크와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폐암 투병 중인 할머니는 정기적으로 병원 검진을 받고 있지만, 연로한 탓에 적극적인 항암치료나 수술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래도 할머니는 언변에 능하고, 총기가 살아 있다. 쉼터 내에서 '인텔리'로 불릴 정도다. 지난 8일 기자와 만난 할머니는 "(식민지 시대) 힘이 없어 당한 건데 누굴 나무라겠나. 그때 백성들은 가진 것을 모두 빼앗겼다"면서도 "일본이 여전히 우리를 얕보기 때문에 요즘도 태도가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윤○○ 할머니는 독립군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13세 때 일본군 위안부로 차출됐다. 하루 수십명씩 밀려드는 일본군인들을 상대하면서 두려움과 고통에 소리치면 일본 군인은 할머니를 더 난폭하게 대했다고 한다. 일본군한테 그렇게 고초를 겪고도 할머니는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일본이 너무 불쌍해 도와줘야지"라고 안타까워했다.
현재 할머니는 서울 서초구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다. 손주자랑, 자식자랑이 할머니의 낙이다. 큰딸이 홀로 사는 할머니를 매일 들여다본다. 할머니 딸은 '어머니의 건강이 안 좋아져서 빨리 이 문제가 어떻게라도 끝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할머니 역시 위안부 문제 해결을 갈구한다.
송신도 할머니는 1922년 충남 계룡산 부근에서 태어났다. 16세에 "돈을 많이 버는 일이 있다"는 어느 여자의 말에 속아 중국 우창의 위안소로 끌려갔다. 해방 후 한 일본군의 손에 끌려 함께 일본으로 갔으나 곧 버림받고 만다. 그 후 재일동포 남성과 함께 살기도 했지만, 지금은 일본에서 혼자 거주 중이다.
송 할머니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법정 투쟁을 벌였다. 영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2009)'는 송 할머니의 10년에 걸친 소송 과정을 담았다. 할머니는 2011년 일본 대지진으로 연락이 끊기기도 했다. 송 할머니는 '재일 조선인 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의 도움으로 일본 도쿄에서 지내고 있다.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난 안○○ 할머니는 14살 때 저울 위에 올라갔다가 또래보다 덩치가 크고 몸무게가 많이 나간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트럭에 실려 중국 위안소로 끌려갔다. 1946년 천신만고 끝에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남자라면 징그럽다'며 결혼은 하지 않았다. 대구에서 강원도로 거처를 옮겨 다니던 할머니는 지난해 말까지 다세대 반지하방에서 생활을 했지만 지금은 조카 내외와 함께 살고 있다.
할머니의 방에는 고혈압, 당뇨, 관절염 약들이 수두룩하다. 활동가들이 찾아가면 반갑게 맞아주고 오히려 젊은 사람의 건강을 걱정해주는 따뜻한 성격이다. 할머니는 지난 5월 수원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위해 성금을 내고 제막식에 참석하는 등 대외활동도 열심이다.
양○○ 할머니는 192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8살에 "좋은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말에 속아 배를 타고 따라간 곳이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에 위치한 위안소였다. 3년 후 해방이 되고 나서야 고향에 돌아왔다.
2007년 막내딸까지 결혼한 이후 혼자 살고 있다. 할머니는 지금도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걱정돼 노인정에 가지 않는다. "노인정에 가면 서로 남 흉보고 말들이 많아서 싫어. 그냥 이렇게 종일 집에 있는 게 편하지."
깨끗이 정돈된 할머니의 집안 풍경처럼 깔끔하고 곧은 성격이지만, 낯가림이 심해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곳도 피한다. 할머니는 관절염이 심해 거동이 어렵고 약을 복용하고 있다.
박○○(92) 할머니는 공개를 꺼리는 데다 증언집도 따로 없어 동원 시기나 동원 장소 등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시민단체 관계자에 따르면 박 할머니는 위안소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후 부모님이 돌아가신 친정집을 나왔다. 이곳저곳을 떠돌던 할머니는 이후 미군 기지촌에서 지냈다고 한다. 박 할머니의 신산한 삶을 버티게 해 준 건 혼혈 아들이었다. "어느 때는 어린 아이게 먹일 게 없어 사흘을 굶긴 적도 있어요."
2001년까지만 해도 월 5만원짜리 사글세 문간방이 할머니의 거처였다. 한국정신대연구소 관계자에 따르면 할머니를 처음 만난 1993년에는 다 쓰러져가는 오막살이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외로운 삶을 이어오던 박 할머니는 이민간 아들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살고 있다.
1923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다. 20세 때 중국 후난성(湖南省)으로 끌려가 4년 동안 위안부 생활을 했다. 할머니는 1945년 8월 일본군이 패전한 후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일본 조계로 도망쳤으나 수치심 때문에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중국인 남성과 결혼해 후베이성(湖北省) 샤오간(孝感)에 정착했다. 할머니를 만난 관계자가 "고향에 가고 싶지 않으세요?"라고 묻자 "고향에 가서 뭐해 가봐야 아무도 없는데"라고 입 꾹 닫던 할머니. 60년 넘게 샤오간에 살면서 낯선 땅이 고향이 되고 낯선 말이 모국어가 돼 버렸다.
한국어는 잊어버리고 우한(武漢) 사투리 밖에 못 하던 할머니는 일행 한 명이 '목포의 눈물'을 부르자 나즈막히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낯가림이 심한 박○○(87) 할머니는 도통 속 얘기를 하지 않아 할머니를 찾아보는 시민단체 관계자들도 정확한 동원시기나 장소를 모른다. 50대 아들과 60대 딸이 유일한 혈육이다. 30대 후반에 남편과 사별하고 품삯으로 남매를 키웠다.
포항에 홀로 살고 있는 할머니는 '외롭다'는 말을 부쩍 자주 한다고. "할머니께서 '가까운데 빈집 많은데 이사오면 안 되겠느냐'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손정애 자원봉사자의 말이다. 텃밭에 옥수수ㆍ고추ㆍ깨ㆍ콩 등을 키우는 할머니는 손님이 온다고 하면 옥수수를 잔뜩 삶고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할머니는 초저녁 잠이 많다. 밤 9시면 잠들었다가 새벽 1~2시면 깨는 생활의 반복이다. 빈집이 위안소 독방을 연상시키는 것이 싫어서일까. 할머니는 정규 방송이 끝날때까지 TV를 틀어둔다.
박숙이 할머니(92)는 열여섯 살 때 바닷가에서 조개를 잡다가 영문도 모른 채 일본 나고야로 끌려갔다. 10여명의 조선 처녀들과 감금돼 있다가 중국 만주로 이동, 6년 동안 만주와 상하이의 위안소를 떠돌았다. 같이 끌려간 고종사촌은 해방을 맞은 해에 할머니가 보는 앞에서 일본군 총에 맞아 사망했다. 1948년에 귀국해 3년 만에 고향인 남해로 돌아와 1남2녀를 입양해 키웠다.
할머니는 현재 방 두 개와 조그마한 부엌이 딸린 집에서 혼자 생활한다. 수첩에 꽃ㆍ동물 그림을 그리고 공기놀이를 하면서 무료함을 달랜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려 기자가 무릎을 꿇고 자리를 잡자 "일본사람만 무릎을 꿇는다"며 호통을 쳤다. 이날 할머니는 열 손가락에 빨갛게 봉숭아 물을 들였다.
박○○ 할머니(89)에 대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집은 따로 나와 있지 않다. 박 할머니의 경우 근래에 손녀의 신고로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마쳤지만 공개되는 것을 꺼려 해 할머니의 정확한 동원 시기와 장소 등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시민단체 관계자에 따르면 박 할머니는 지난해 봄 고관절과 허리 수술을 받은 이후 거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다. 우울증도 앓고 있다고 한다. 1년 넘게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는 할머니는 24시간 간병인의 돌봄을 받고 있다. 평소 편식을 하지 않는 할머니지만 현재는 치아가 거의 없어 먹고 싶은 음식을 맘껏 못 드시는 것이 안타깝다고 이 관계자가 전했다.
1924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박옥선 할머니는 17세 때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무링(穆陵) 인근으로 강제 동원됐다. 당시 일본 이름은 아키코. 4년 동안 위안소 생활을 하다가 해방 후 중국에 정착했다. 사망신고가 돼 있던 터라 어렵게 국적을 회복하고 2003년 4월 주민등록증을 취득했다. 2002년 8월 나눔의 집에 입소한 할머니는 향수병을 달래기 위해 개 두 마리를 키우고 있다.
아흔의 나이에도 방문객이 오면 대화가 가능할 만큼 정정한 편이다. 앓고있는 지병도 없다. 할머니 소원은 중국에 남아있는 손주들을 한국에 데려오는 것. 손자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까. 손자 또래가 나눔의 집에 방문하면 손을 덥석 잡으며 꽤 반가워하신다. 헤어질 때는 연신 "또 놀러오라"며 이별을 아쉬워하는 할머니다.
현재 울산에 살고 있는 김○○(86) 할머니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김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에 동원된 시기와 어떻게 끌려갔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28년에 태어났다는 것이 전부다. 할머니 스스로가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알리기 원치 않기 때문이다. 정대협에 따르면 김 할머니는 다행히 집 근처 공원에 혼자 다닐 정도로 아직 건강하다고 한다.
현재 생존해 있는 대부분의 피해 할머니들은 건강이 크게 좋지 않아 지역 봉사자나 활동가들의 돌봄 서비스를 받고 있지만 김 할머니는 외부인의 방문을 꺼리며 가족과 함께 지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상북도 안동 출신인 김외한(80) 할머니는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가장 젊다. 김 할머니는 지난해 7월 남편과 함께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 찾아와서 재입소했다. 앞서 2012년 나눔의 집에 처음 왔을 때보다 몸 상태가 나빠져 있었다. 스스로 식사를 하지 못할 정도였는데 지금은 몸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지난 9일 만난 김 할머니는 바지를 걷어 올려 수술 자국을 보여주며 연신 '다리가 아프다'고 했다. 이미 두 무릎은 수술을 받은 상태로 할머니는 성인용 보행기에 의지해 생활하고 있다. 유독 주름살이 많은 김 할머니는 기자에게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다"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경기도 평택이 고향인 김정분(84) 할머니는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준다는 말에 속아 15세에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갔다.
세 차례의 뇌경색을 겪은 뒤 2012년 나눔의 집에 입소했다. 집중치료실 침대에 누워 양손과 고개를 조금 움직이는 것이 김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치매를 앓는 탓에 한 달에 한 번 찾는 아들 내외를 반갑게 맞아 놓고도 이들이 돌아가고 나면 금새 방문 사실을 잊는다고 한다.
낯선 사람을 보자 눈만 깜빡이던 김 할머니는 이내 빨간색 매니큐어를 칠한 손을 내민다. 얼마 전 봉사자가 칠해줬다는데 손톱이 자라 반 밖에 안 남았다. 힘겹게 내민 손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1924년생인 김양주 할머니는 경상남도 마산에 살고 있다. 어릴 적 아버지의 가정 폭력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집을 나왔다가 위안소로 끌려갔다. 지난달 만난 할머니는 치매 초기 현상에 어지럼증, 고혈압, 당뇨 등을 앓고 있었다.
60대인 수양아들은 6개월 전 한쪽 다리에 혈전증이 심해져 무릎 아랫부분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할머니는 "기가 차 죽겠다. 젊은 사람이 저러니까 내가 더 마음이 아프다"며 속상해 했다. 요양보호사가 하루 3시간30분씩 이들의 집을 찾아 설거지, 요리, 빨래 등 집안일을 해주고 있다.
가톨릭 신자인 김 할머니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오늘(18일) 명동성당에서 집전하는 '평화와 화해의 미사'에 참석했다.
1932년생인 김○○ 할머니는 피해자들 가운데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한다. 1년가량 위안소에서 고초를 겪고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위안부 피해자들 대부분이 학교를 다닐 기회를 얻지 못한 반면 김 할머니는 귀국 후 중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결혼도 해서 아이도 낳고, 지금은 손자의 재롱에 즐거워하는 평범한 '할머니'의 삶을 이어오고 있다.
경상남도에 거주하고 있는 김 할머니는 친구나 지인뿐 아니라 가족들에게까지도 본인이 위안부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있다. 학교 동창을 비롯해 지역사회에 인맥이 퍼져 있어 위안부였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가족들이 감내할 고통을 염려한 때문이다.
김○○ 할머니는 1932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주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12살에 다른 학생들과 함께 일본으로 '송출'됐다. 할머니는 그때를 떠올리며 "우리는 놀러가는 줄 알았지"라고 증언했다. 비행기 부속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9개월간 일을 하다가 군인 수용소 근처의 큰 건물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게 됐다.
할머니는 현재 경기도의 요양병원에서 지내고 있다. 여동생이 할머니의 손발이 돼주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화가 나면 버럭 호통을 치고 흥에 겨우면 큰 소리로 노래도 부를 만큼 에너지가 넘쳤던 할머니는 지금은 기력이 약해져 이마저도 힘들다고 한다.
김복득 할머니는 1918년 한산도 제승당이 내다보이는 통영에서 4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12살 때 아버지를 여읜 할머니는 22살 되던 해 '넓은 세상에서 돈 벌게 해주겠다'는 말에 속아 위안부로 강제동원됐다. 집 떠난 지 7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김 할머니는 학술대회에서 수차례 증언하는 등 위안부 피해자 활동에 적극적이다. 2011년 2000만원의 장학금을 기부한 데 이어 지난해 11월엔 위안부 역사관 건립하는 데 쓰라며 2000만원을 내놓기도 했다. 일본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수십번은 더 들었을 질문, 대답은 한결같다. 1994년 피해자등록을 한 이후 줄기차게 주장했지만 아직 이루지 못한 것. "내한테 마 사과만 하면 되지. 내 죽기 전에 사과만 해서 나한테 미안타고 그것만 하면 돼. 더는 묻지마라."
1926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의 강제동원 시기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할머니 진술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증언집도 따로 없다. 인터뷰를 진행한 시민단체 관계자에 따르면 연행 나이는 16~17살로 추정되며 취업사기로 대만위안소로 끌려갔다. 대만에서 해방소식을 전해듣고도 1946년 가을에야 한국 땅을 밟았다.
할머니는 현재 대구 한 임대아파트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다. 최근 건강이 악화돼 지난 6월 열린 합동 생일잔치에도 불참했다.
할머니 댁 베란다에는 화분이 하나 있다. 빨갛게 봉오리를 피운 꽃의 목이 꺾일까 나무젓가락으로 줄기를 받쳐 놨다. "어느날 보니 할머니가 그렇게 대놓았더라고요." 요양보호사의 설명이다. 꽃을 애지중지하는 할머니의 심성이 꼭 소녀 같다.
김순옥 할머니는 1922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집 앞에서 보면 평양 모란봉이 내다보였다. 오빠 둘,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 어린시절, 콩으로 죽 쒀 먹을 만큼 생활이 궁핍했다. 7살 때 남의 집 살이를 했다. 할머니는 18살 때 중국 랴오닝성으로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했다.
이후 중국에서 생활하던 김 할머니는 2005년 위안부 피해자임을 밝히고 2006년 12월 영구 귀국했다. 현재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는 할머니는 요즘 팔다리 힘이 약해져 외출할 때 휠체어 없이는 거동이 불가능하다. 거동이 불편해도 바깥 구경은 반갑다. 할머니는 휠체어를 보면 "어이야, 나간다고?"라며 손뼉을 쳤다. 얼마 전 딸이 선물해준 효도라디오를 듣는 것이 할머니의 낙이다.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난 김군자 할머니(88)는 10대에 부모를 여의고 1942년 우리 나이로 17살때 중국 지린성(吉林省) 훈춘(琿春) 위안소로 강제동원됐다.
해방 후 38일을 걸어 조국에 돌아왔다는 할머니는 "하루에 40여명을 상대로 성노리개가 되어야 했고 죽지 않을 만큼 맞아서 고막이 터졌다"고 위안소 생활을 기억했다. 2007년 미국 의회의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서 끔찍했던 과거사를 증언했다.
또 할머니는 정부에서 받은 보상금 등을 고스란히 모았다가 자신처럼 부모 없는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써달라며 2000년, 2006년 두 차례에 걸쳐 총 1억원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했다. 김 할머니는 1998년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에 들어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1925년 경북 포항에서 태어난 김달선 할머니(89)는 흥해시장에서 일본 순경에 의해 경찰서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인도네시아로 보내졌다. 이곳에서 약 5년간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하다가 1946년 봄 무렵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23세쯤 결혼을 했으나 아이를 낳지 못해 남편과 3년 만에 헤어졌다.
현재 김 할머니는 치매 증상과 노환으로 지난해 5월부터 대구의 한 병원에 입원 중이다. 오랫동안 봐온 낯익은 얼굴은 아직 알아보고 반가워한다. 지난 5월30일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관계자들은 이 병원을 찾아 할머니의 조촐한 생일잔치를 열었다.
경남 양산 출신의 김복동 할머니(88)는 14살에 위안소로 끌려가 8년의 세월을 희생당했다. 하지만 이제는 어엿한 인권운동가다. 2년 전 할머니는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금을 받으면 전쟁 피해 여성을 돕겠다"고 선언하고, 일명 '나비기금'을 조성하는 데 앞장섰다. 재일조선학교를 지원하는 후원금도 내놨다. 할머니는 왼쪽 눈을 실명했고, 최근 오른쪽 눈도 시력이 악화돼 병원 진료를 받고 있다. 요즘 수요집회 때마다 선글라스를 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난달 31일 만난 김 할머니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앵무새처럼 맨날 똑같은 말만 하니 입이 아플 지경"이라고 토로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이왕 칼을 뺏으니 끝을 봐야지"라고 말을 이었다.
1928년 오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길원옥 할머니는 가족과 함께 평양에서 지내다가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13살, 15살 두 차례 중국에 있는 위안소로 끌려갔다. 현재 정대협이 운영하는 '평화의 집'에 사는 길 할머니는 매주 수요집회에 참석하고 있으며, 지난 6월에는 스위스 제네바의 유엔(UN) 인권최고대표 사무실에 방문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 중이다. 당뇨와 합병증 때문에 병원에 다니고 있지만, 할머니는 본인이 시력도 좋고 귀도 밝은 편이라고 자부한다. 지난달 31일 할머니는 기자와 만나 일본 정부를 향해 이같이 말했다. "사람이니까 죄를 안 짓고 살 순 없다. 하지만 죄를 지었으면 사과하고 인정해야 한다."
1926년에 태어나 열여덟 살에 일본 히로시마로 끌려가 5개월을 보냈던 김○○ 할머니. 서울 강서구에 살고 있는 김 할머니는 휠체어 없이는 거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건강이 쇠약해진 상태다. 낮에는 요양보호사의 도움으로 생활하고 있지만, 저녁에는 하릴없이 혼자 침대에서 누워 지내는 시간이 많다고 한다. 지난해에는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다리까지 다쳐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정대협 활동가들이 할머니 댁을 방문하는데, 오매불망 그들만 기다릴 정도로 정이 많다. 할머니는 과일을 손수 사다 놓기도 했다고. 활동가들이 올 때가 되면 "보고싶다.
1930년생인 김○○ 할머니는 경상남도에 살고 있다. 김 할머니는 위안소로 끌려간 후 비행기 폭격으로 청력을 크게 잃었다. 2010년 경남 도ㆍ시ㆍ군의회의 위안부 결의문과 대국민 탄원엽서를 전달하기 위해 일본에 방문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종종 집 근처에 있는 주민센터에 들러 차도 마시고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무료함을 달랬다. 주민센터 직원은 "직원들 바뀐 것도 꿰고 있을 정도로 정정하시다"고 말했다. 할머니에겐 미국에 터를 잡은 딸이 하나 있다. 올해에도 미국에 있는 딸의 집에서 두 달간 있다가 지난달 딸과 동반 입국했다. 딸은 앞으로 1~2년간 할머니를 곁에서 보살필 계획이란다.
경상북도 상주에서 12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난 강일출(86) 할머니는 16세 늦여름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張春)의 위안소로 끌려갔다.
당시 마을에는 '처녀공출'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다고 한다. 강 할머니는 이를 피하기 위해 어머니 친구 집에 머물기도 했었다. 가족 품이 그리워 다시 집에 돌아온 것이 화근이었다. 마을과 조금 떨어진 외딴집으로 칼을 찬 일본 순사와 누런 옷을 입은 황군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강 할머니에게 베를 짜는 공장에 가자며 강제로 짐을 싣는 트럭에 태웠다.
1945년 초여름 강 할머니는 독립군의 도움을 받아 어룬춘(鄂倫春)으로 피신했다. 두 번 결혼을 했으나 모두 이혼했다. 22세부터 53세까지 병원에서 간호사 생활을 했다. 1998년 적십자를 통해 해방 후 처음으로 한국을 다시 찾았다. 1999년 71세의 나이로 영구 귀국해 이듬해 국적을 회복했다. 강 할머니는 현재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전라남도 무안 출생의 공○○(94) 할머니는 16세이던 1935년 비단 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말에 속아 평양을 거쳐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하이청(海城)의 위안부로 강제동원됐다.
이후 하이청과 상하이(上海), 하얼빈(哈爾濱) 등에서 3년여간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다. 당시 연을 맺은 전라남도 보성 출신 남자와 1945년 전라남도 해남으로 귀국했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아 미안한 마음에 결국 헤어졌다. 이후 28세에 공 할머니보다 20세가 더 많은 박모씨와 혼인했다.
34세의 나이에 박씨와 아들을 낳았다. 같은 해 남편 박씨가 죽었다. 이후 공 할머니는 36세에 당골(무당)이 됐다. 1958년 당골 하는 남자 사이에서 딸을 낳았다. 하지만 딸은 3년 뒤 물에 빠져 사망했다. 공 할머니는 현재 아들 내외와 손녀들과 함께 전라남도 해남에서 살고 있다.
곽○○(89) 할머니는 19살에 동네 뒷산에서 나물을 캐다가 중국 위안소로 끌려갔다. 중국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겪은 곽 할머니는 이후 60여년을 중국에서 무국적자로 살아야했다. 곽 할머니가 다시 대한민국 국적을 얻는 것은 2004년. 곽 할머니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56년 만에 국적을 회복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곽 할머니는 광주에 있는 여동생의 집에 머물며 밭에 나가 일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가벼운 치매증상과 허리 종양으로 인한 요통 탓에 전라남도 한 요양병원에서 생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