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4일 만난 김양주(90) 할머니가 기자들을 보고 내뱉은 첫마디다. '축구'는 바보와 비슷한 뜻의 경상도 사투리. "할머니랑 얘기하려고 서울에서 마산까지 내려 왔대요."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 마창진시민모임의 이경희 대표가 이렇게 설명하자 할머니는 "옛날에는 공부도 못했고…. 그래서 나는 축구 아이가"라고 되풀이했다.
김 할머니는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다. 아버지의 폭력과 굶주림에 시달려야만 했다. 어머니는 딸의 손을 잡고 마산으로 왔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할머니는 취업사기를 당해 위안소에 끌려갔다. 고국에 돌아와서도 학교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식당에서 일하고 식모 생활도 하며 생계를 꾸렸다. 부모 없는 아이를 데려다 아들처럼 키워 지금까지 함께 지내고 있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할머니는 지금도 연필을 잡는 것 자체를 두려워한다. 이 대표는 "어린 시절 가정폭력과 위안소에서 겪은 고초 때문에 할머니의 지능과 기억력은 다소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 사실을 진술한 증언은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다. 여성가족부와 마창진시민모임 측이 관련 기록을 갖고 있지만 개인정보이기 때문에 공개하긴 어렵다는 입장이다. 더군다나 최근 치매가 악화되면서 할머니의 입을 통해 자세한 증언을 들을 수 있는 시기도 놓친 것이다.
요즘 할머니는 "잊어버렸다" "모른다"는 말을 반복할 때가 부쩍 늘었다. 얼마 전 아들이 당뇨를 앓는 할머니를 위해 청국장환을 사왔는데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단다. 할머니는 이날도 "몰라, 이저뿌따"며 딴청을 피웠다.
치매가 심해지면서 화내는 횟수도 잦아졌다. 집 청소를 해주는 요양보호사와 승강이를 벌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요양보호사가 냉장고 속에 상한 음식을 처분하려고 하면 "내 살림이다. 니가 왜 버리느냐"며 성을 낸다. 옷 갈아입자고 하면 "잔소리하지 말라"며 손을 뿌리친다. 할머니가 한사코 고집을 부린 탓인지 부엌 탁자 위에 있는 반찬 통에선 쉰내가 풍기고 있었다. 66㎡(20평) 남짓한 집 안에는 각종 살림살이가 바닥에 놓여 있어 발 디디기 힘들 정도였다. 안방에는 겨울이불, 수건, 옷가지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이 대표는 "위안부 피해자들은 대부분 10대에, 지적 발달을 비롯해 정서적으로 풍부해져야 할 가장 중요한 시기에 험한 일을 당했다"며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은 물론 인격을 다듬을 만한 기회도 얻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 대표는 "고국에 돌아온 후에도 그저 생존에 허덕여야 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면서 "할머니들은 가치 있고 고상하고 품위 있는 삶을 준비할 새도 없었다"고 전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노환이 심해지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우울 증상까지 호소하고 있다. 우울 경험을 지속적으로 겪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여성가족부가 실시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47명 중 38.3%가(18명) '최근 1년간 2주 이상 지속적으로 슬프거나 우울했던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2010년 13.6%(6명), 2011년 31.8%(14명), 2012년 38.6%(17명)로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다.
또한 응답자의 63.6%(28명)는 우울증 위험집단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지난 1년간 자살을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다'고 답한 응답자도 전체의 36.4%(16명)에 달했다. 2012년 40.7%보다는 조금 낮은 수준이지만 2010년(21.1%)과 2011년(32.8%)에 비하면 높은 수치다.
위안부 피해자 지원 단체와 전문가들은 이런 할머니들의 정서안정과 심리 회복을 위해 원예치료, 미술치료 등을 주로 사용한다. 이미 고인이 된 피해 할머니들이 그림이나 꽃누르미(압화) 작품을 많이 남긴 이유다. 대구에 살던 고(故) 심달연 할머니가 대표적인 경우다. 할머니는 붓을 가지고 해야 하는 미술 치료를 불편하게 느꼈다고 한다. 김양주 할머니처럼 연필을 단 한 번도 잡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할머니는 꽃을 좋아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이것이 원예치료 전문가 주은연씨와 할머니가 만나 6년의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 계기였다.
위안소에서 돌아온 후 기억상실증까지 걸렸던 심 할머니는 항상 소극적인 모습이었다. 공식석상에선 매번 "내가 뭘 하겠노"하며 말없이 앉아 있기만 했다. 우울감 검사 수치도 높게 나왔다. 평소에 "죽으면 다 끝나는 거지"라는 말을 자주 하던 심 할머니였다. 주씨는 "할머니는 자존감이 매우 낮은 상태였다. 그래서 초반에는 꽃을 심고, 채소도 기르는 등 할머니가 좋아하는 활동을 함께하면서 경계심을 없애고 친밀감을 높여 나갔다. 그러자 심 할머니가 어렸을 적에 집 앞마당을 꾸미던 추억을 꺼내놓으며 마음을 열었다"고 말했다.
이후 원예 수업은 심 할머니가 사는 영구임대아파트 안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1~3시간 이어졌다. 할머니의 압화공예 실력은 나날이 상승했다. 작품의 스케일도 갈수록 커졌다. 처음에는 열쇠고리, 머그컵 장식을 하는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나중에는 4절지 크기 액자에 담길 화려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할머니는 깜짝 놀랄 정도로 재능이 많고 집중도도 높았다." 나중에 심 할머니는 주씨의 도움 없이도 직접 꽃을 말리고 작품을 만들 만큼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심 할머니가 압화 작품 만들기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전시회를 열었다. 작품이 해외에서 비싼 값에 팔리기도 하면서 할머니는 자신감을 얻게 됐다. 유명한 작가들은 자신의 그림에 서명을 넣는다는 주씨의 말에 심 할머니는 공책에 이름을 쓰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펜에 대한 불안증이 사라진 것이다. 더 나아가 심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자 명예 회복을 위해 국내외에서 다양한 활동도 펼쳤다. "본인 스스로 주변사람들에게 '내가 전보다 똑똑해진 것 같다'고 말하실 정도였어요. 이전까지 위안부 피해에 대해 '내가 바보라서 당했다'고 하던 할머니는 어느 날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 받아야지'라고 결심한 듯 말씀했죠." 주씨가 전하는 심 할머니의 생전 변화상이다.
2007년 심 할머니의 사연을 다룬 그림책 '꽃할머니(글ㆍ그림 권윤덕)'가 제작에 들어갔다. 그런데 2010년 초 심 할머니는 간암 통보를 받았다. 그해 6월 그림책이 출간돼 할머니를 위한 헌정식이 열렸고, 많은 사람들의 축하가 이어졌다. 하지만 할머니의 웃음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헌정식이 열린지 한 달 만에 병원에 입원한 심 할머니는 해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주씨는 심 할머니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할머니는 원예수업이 있는 날을 잊지 않고 언제나 저를 기다리셨어요. 그런데 가끔 깜빡하고 집에 안 계실 때가 있더라고요. 알고보니 거동이 힘든 이웃집 할머니의 집에 가서 밥도 해주시고 집안일도 해주시고 있었어요. 일상생활이 어려운 장애인 이웃을 위해 대신 장을 봐주시기도 했고요. 할머니는 영구임대아파트에 함께 사는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고 있었던 거죠."
위안부 리포트 기획취재팀 = 김동선 팀장, 김보경·김민영·주상돈 기자 matthew@asiae.co.kr
사진 = 백소아 기자 sharp2046@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