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숙이 할머니(92)의 말에 김정화 남해여성회 대표는 쑥스러운듯 웃어보였다. 박 할머니는 2011년 뒤늦게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했다. 슬하에 1남2녀를 뒀지만 남해에 거주하는 이는 아들뿐이다. 아들과도 떨어져 산다. 아들ㆍ딸의 빈자리를 대신 채워주는 사람이 김정화 대표다. 할머니는 지난해 5월 12년 만에 남해 밖을 벗어나봤다고 했다. 김 대표와 함께였다.
남해여성회처럼 지역사회에 퍼져있는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에게 단비같은 존재다. 들여다보는 이 없는 할머니들에게 응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기댈 수 있는 보호자이자 삭여지지 않는 아픈 과거를 가감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벗이기도 하다.
수도권에 기반을 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나눔의집 등은 위안부 관련 단체로는 제법 알려진 단체다. 정대협의 경우 1992년 1월에 시작해 단일시위로는 최대 횟수를 기록하고 있는 '수요시위'를 이끌고 있다. 나눔의집은 국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살고 있는 쉼터다. 2014년 8월 현재 10명의 피해 할머니들이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렇다보니 위안부 관련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두 단체는 신문ㆍ방송의 주목을 받는다.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국내외 인사도 이 두 곳을 주로 찾는다.
상대적으로 지역에 거점을 두고 있는 시민단체는 '소외감'을 호소한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대표적인 단체는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대구시민모임, 일본군 위안부할머니와 함께하는 마창진(마산ㆍ창원ㆍ진해)시민모임, 일본군 위안부할머니와 함께하는 통영거제시민모임 등이다. 대구시민모임과 마창진시민모임은 각각 5명의 피해 할머니들을 돌보고 있다. 통영거제시민모임은 한때 인구 대비 단일지역으로는 가장 많은 피해자 할머니(8명)를 돌봤으나 현재 돌보는 피해자는 김복득 할머니(96)가 유일하다. 김 할머니는 현재 통영노인병원에 입원해 있다.
주로 후원금으로 운영하는 이들 지방 시민단체는 운영조차 버거운 실정이다. 인지도가 낮다보니 후원금으로 걷히는 액수가 많지 않을뿐더러 단체 독립성을 위해 정부보조금도 받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구시민모임은 정부나 재단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 공모사업에 응모해 사업비를 조달하기도 하지만 기본 방침은 '정부보조금은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창진시민모임의 경우 현재 30여명의 후원자가 매달 월 20여만원씩을 보태고 있다. 박숙이 할머니를 돌보고 있는 남해여성회의 경우 여성가족부 위탁 사업인 아이돌봄 지원사업 보조금(2억5000만원)을 받고 있지만 80%는 돌봄가정 지원비로 소요된다.
지난달 14일 이경희 마창진시민모임 대표는 창원 푸른노인병원에 입원해 있는 이효순 할머니(87)를 찾았다. 1시간가량 병원에 머무른 뒤 다시 마산으로 차를 몰았다. 김양주 할머니(90)를 찾아뵙기 위해서다. 이날 김 할머니의 아들은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가 '난 약묵기 싫다'며 약을 쓰레기통에 버린다"고 고자질했다. 이에 질세라 김 할머니는 "니도 정신없을 때 그러제"라며 티격태격했다. 마산과 창원은 인근 지역이긴 하지만 도로 정체로 1시간가량의 여정이었다. 창원에서 마산으로 다시 창원으로 돌아오는 일정이 피곤하지 않냐는 물음에 이 대표는 "뭘 바라고 하면 이렇게 못한다"며 "10년 넘게 봐온 분들이 대다수라 내가 안 챙기면 어떻게 하나란 마음으로 고단함을 달랜다"고 말했다.
통영거제 지역도 열악하긴 마찬가지다. 2002년부터 단체 대표를 맡고 있는 송도자 대표는 "지역에서 할머니를 모시는 것이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다. 지금처럼 간병비도 지원되지 않고 요양보호사란 직업이 대중화되기 전에는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간병사 자격증을 직접 취득해 할머니들을 간호했다"고 말했다. 요양보험제도가 신설되고 요양보호사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온 이후부터 상황이 나아졌다는 것이다.
지역 사회의 무관심이나 운영에 대한 어려움과는 별개로 이들 단체는 중앙정부와의 소통부재를 문제점으로 지적한다. 한 지역 시민단체 대표는 "여가부에 가서 담당국장을 만나려고 요청했더니 만남 자체가 거부됐다. 국장이 없으면 과장이라도 만나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는데 그러지 않더라. 정대협이나 나눔의집 대표가 요청했으면 그랬겠느냐"고 꼬집었다.
이들은 지난달 여가부 주체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법 모색 대토론회'를 여가부의 불통행정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았다. 당시 이 토론회는 지방에 있는 단체 관계자들이 모여 의견을 제시하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여가부는 대뜸 시민단체 대표들에게 '이런 이런 행사를 열 계획이니 동의하라'는 식의 통보만 했다고 한다. 여가부의 일방적인 태도에 발끈한 시민단체들이 '동의할 수 없다'고 어깃장을 놓자 이 토론회 패널석은 위안부 관련 교수 연구원들이 채웠다. 정작 현장에서 뛰는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관객석에 앉아 토론회를 지켜봤다. 한 시민단체 대표는 "민간단체와의 파트너십을 형성하고 민주적 협치가 필요하다"고 여가부를 향해 쓴소리를 했다.
기력이 쇠한 할머니들의 별세 이후 단체의 존립여부도 고민거리다. 더불어 할머니 없이 지역사회에서 단체의 대중화를 어떻게 꾀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이야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 활동, 강연 등을 통해 일반시민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있지만 현재 생존 할머니들의 평균 연령은 88.4세. 향후 10년 안에 생존을 장담하기 어려운 할머니들이 대다수다.
이에 대한 자구책으로 지역단체들이 공들이는 사업이 바로 '역사관 건립'이다. 그러나 이것도 쉽지 않다. 건립비용 때문이다. 부지를 확보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현재 대구와 통영에서 역사관 건립을 추진 중인데 대구와 달리 통영은 부지조차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다. 대구는 2009년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한 이후 건립 목표금액(12억5000만원) 중 9억5000만원을 확보한 상태다. 2013년 3월부터 거리모금 캠페인을 진행하는 등 부지런히 홍보활동을 벌인 결과다. 부산의 경우 김문숙 부산 정대협 대표가 사비를 털어 역사관을 개관했지만 운영비에 쪼들려 고사 위기에 처해있다.
혹자는 정대협과 나눔의 집에서 운영하는 역사관, 박물관으로 기념사업이 충분치 않느냐고 지적한다. 차라리 관련 자료를 한 데 모으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지역 중ㆍ고등학교 학생들이 이 문제를 지역에서 쉽게 접할수 있는 장소가 많을수록 역사교육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라며 "위안부 역사관에 가겠다고 매번 서울까지 가야 한다면 그 수고로움 때문에 일정을 포기하는 경우가 생길수도 있고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서울에만 가라는 법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위안부 리포트 기획취재팀 = 김동선 팀장, 김민영·주상돈·김보경 기자 matthew@asiae.co.kr
사진 = 백소아 기자 sharp2046@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