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학 교수라는 지위에도 '위안부'라는 생경한(?) 주제에 매달린 것은 과거의 경험 때문이었다. 1943년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대의 전신)에 재학 중이던 그는 '1학년 학생 전원은 본관 1층 염색실에 모이라'는 집합 명령을 받았다. 일본군인으로 보이는 무리들이 파란잉크로 깨알같이 적힌 A4용지를 나눠줬다. 종이에 적힌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감히 묻지도 못했다. 총독부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이었다. 무조건 지장을 찍으라고 했다. 지장 찍은 종이를 군인들이 도로 걷어갔다. "정신대로 가는 데 동의하는 거라 생각했지. 그땐 위안부라는 말을 아예 몰랐어."
그는 다음 날 부모님의 동의를 얻어 곧바로 학교에 자퇴서를 냈다. '이렇게 자퇴서를 내면 학교에 학생이 안 남을 텐데…'라는 염려가 들 정도로 자퇴하려는 학생들이 줄을 섰다고 윤 전 교수는 당시 상황을 전했다. 후에 자퇴하지 않고 학교에 남아 있었던 동기들에 따르면 지방으로 보내진 이들은 그곳에 끌려온 여성들의 군사훈련을 담당하는 교관 노릇을 했다고 한다.
본인은 징발을 용케 피했지만 당시 정신대로 끌려간 이들의 생사가 궁금했다. "해방이 돼 징용ㆍ징병으로 끌려갔던 남자들은 돌아오는데 여자들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없었거든." 윤 전 교수는 1945년 해방 직후 학교가 파하면 서울역으로 부리나케 갔다. 당시 학도병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인천항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시절이었다. "정신대로 끌려간 여자들은 어떻게 됐나요?" 아무나 붙잡고 물었다. 묵묵부답이었다. 한 사람이 씹던 껌 뱉듯 대꾸했다. "걔들은 위안부야." 위안부, 생소한 단어였다. "위안부가 뭐예요?" 되물었지만 사내는 대꾸 않고 사라졌다. 평생의 과제를 마주하게 된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정신대가 아니라 위안부가 무엇인지 찾아다니기 시작했어."
미국 유학 뒤 이화여대에서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위안부'에 대한 관심이 수그러들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 일본 기자 센다 가코우(千田夏光)가 쓴 '분노의 계절'이란 책 속에서 '종군위안부'를 접하면서 불씨가 되살아났다.
윤 전 교수가 본격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캐기 시작한 건 1980년이었다. 그 해부터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위안부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며 실태조사에 나섰다. 해외 실태 조사는 주로 여름ㆍ겨울 방학을 이용했다. 경비는 일체 개인부담이었다. "미혼이라서 부양할 가족이 따로 없어서 가능했지." 파푸아뉴기니, 태국, 미얀마, 일본, 중국 등 피해 할머니의 목소리를 찾아 해외를 떠돌았다. 일본은 50번 이상 다녀왔다.
파푸아뉴기니는 직항이 없었다. "거기 식인종도 살고 있으니 가지마라"는 큰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오스트레일리아를 거쳐 파푸아뉴기니로 날아갔다.
속내를 도통 드러내지 않는 할머니, 아예 문조차 열어주지 않는 할머니 등 인터뷰는 난망했다. 삼고초려했다. 일제시대 때 서대문형무소에 외삼촌 사식을 넣어주러 가서 기약없이 기다리던 시절이 떠올랐다. 기다림이라면 그때부터 인이 박혔다. 그렇게 어렵사리 100명 이상을 만났고 피해 증언을 확보했다.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처음으로 밝힌 고(故) 배봉기 할머니도 일본 오키나와의 한 오두막집에서 만났다. 이 증언의 기록은 한국정신대연구소 등에 고스란히 보관돼 있다.
그렇게 만난 할머니들의 사연은 기구했다. 만주의 위안소에 있던 할머니들은 일본군이 전쟁 종식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한 위안부는 "러시아 군대가 쳐들어오고 있다"는 말에 깜짝 놀라 탈출하려고 보니 신발이 없었다고 한다. 위안소에만 갇혀 생활하다 보니 신발 신을 일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한 할머니는 일본 지역사회에서 '뭐 자랑할 일이냐고 동네를 시끄럽게 만드냐'며 따돌림을 받았다. 중국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쇼크 탓에 한국말을 잊어버렸다. 윤 전 교수는 중국어가 모국어가 된 할머니에게 '아리랑'을 불러줬단다. "위안소에 있던 처녀들끼리 아리랑을 불렀다는 얘기를 전해들었거든." 아리랑을 나지막이 따라 부르는 할머니 모습에 윤 전 교수는 참 많이 울었다고 했다.
그렇게 취재한 사연을 토대로 그는 1988년 4월 세미나에서 위안부 문제를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위안부 문제가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당시 현장에는 일본과 미국의 활동가들이 많이 자리했는데 위안부 문제를 처음 접하고 충격받은 일부 참석자들은 울기까지 했다고 한다.
위안부 운동은 애초 없는 길이었다. 위안부 운동 1세대로서 격려보다는 비판을 넘어선 비난에, 호의보다는 무관심을 넘어선 적대에 맞서야 할 때가 많았다. 윤 전 교수는 1992년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여성 토론회에 이우정 전 국회의원, 이효재 전 이화여대 교수와 함께 공동대표로 참가해 김일성 주석을 집무실에서 만났다. 북측 대표로는 여운형의 딸 여운구가 참석했다. 당시 김 주석에게 "조선이였을 때 조선 여자로 (정신대로) 끌려갔으니 남북을 떠나 우리의 문제다. 그러니 북한도 일본에 압력을 넣어서 끌려갔던 여자들의 한을 풀어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위안부 문제라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직언하는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일성 주석을 만난 소감을 묻는 말에 '동네 아저씨 같다'고 말했다가 '빨갱이'로 몰려 곤욕을 치렀다. '할머니들을 이용해 돈 번다'는 손가락질도 받았다.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 안에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짓겠다고 하자 일부 독립유공단체 회원들이 몰려왔다. 그들이 '더럽혀진 여자들이 거룩한 땅에 박물관을 세우겠다는 거냐'며 핏대를 세우는 바람에 박물관 건립은 무산됐다. 그럴 때 그만두고 싶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윤 전 교수는 고개를 내저었다. "끝까지 싸워야지."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발족 당시 윤 전 교수의 나이는 이미 65세였다. 은퇴할 나이였지만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증언을 이끌어내는 등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노장이 자꾸 전장을 기웃거리도록 일본은 싸움의 구실을 제공했다. 그는 아소데 츠오 소위가 낸 보고서 '위안소는 건전한 향락소가 아니라 위생적인 공중변소다'라고 표현한 부분을 지적하며 "사람이라면 이럴 수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홋카이도, 삿포로 등의 공문소 보관소를 뒤져 찾아낸 보고서에는 '여자 한 명이 하루에 상대할 수 있는 남성의 숫자가 27명'이라는 내용이 나온다고도 했다. "건강한 여자가 하루에 몇 명의 남자를 상대할 수 있느냐, 그리고 어떻게 하면 군인들이 성병에 최대한 안 걸리느냐, 이런 것을 일본정부가 사전에 면밀하게 고려했다는 거지." 일본군 위안부 동원이 우발적 범행이 아닌 치밀한 계획 아래 준비된 것이었다는 점에서 죄질이 더 나쁘다는 것이다. 또 일본에서 강연하고 나오는 데 기다리고 있던 젊은 일본 남성이 '일본이 전쟁에서 졌으니까 이 위안부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이겼으면 관군이다'라고 말한 대목을 전하면서 윤 전 교수는 "반성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그는 얼마 전 400여페이지에 달하는 초고를 출판사에 넘겼다고 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찾아다닌 이야기를 쓴 것이었다. 집필 작업도 쉽지 않았다. 기억력이 자꾸 흐려지는 탓에 증언 기록 등을 적어놓은 메모를 수시로 들쳐봐야 했다. 기자와의 인터뷰 도중 "숫자는 잘 기억 안 난다"며 "메모를 찾아봐야 한다"고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그의 나이는 생존 할머니들의 평균 연령(88.4세)보다 많다. 강산이 7번 바뀌는 동안 흔들림 없이 '위안부' 문제를 파고든 노 교수에게도 시간은 비켜가지 않은 것이다. 당신이 그토록 한을 풀어주고자 했던 피해 할머니들처럼. 그러나 노 교수는 그가 천착한 위안부 문제와 운동에 대해서 주저하지 않고 이야기한다. "위안부 운동의 기본 태도는 '할머니의 존엄성 찾기'야. 할머니들을 너무 험하게 대했잖아."
위안부 리포트 기획취재팀 = 김동선 팀장, 김민영·주상돈·김보경 기자 matthew@asiae.co.kr
사진 = 윤동주 기자 doso7@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