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img_0204
홀로남은 소녀, 그 쓸쓸함에 대하여... 이름에 복(福)자가 있어 인복이 많은 기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득(96) 할머니는 경남에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다. 지난달 14일 통영고속터미널 근처 꽃집 주인은 김 할머니를 만나러 간다는 기자의 말을 듣고는 빨간 장미꽃 두 송이를 덤으로 줬다. 그는 "예쁘게 해 드려야 한다"며 꽃다발 포장에 그 어느 때보다 정성을 들였다.

김 할머니는 2011년 지역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2000만원, 이듬해 위안부 역사관 건립기금으로 또다시 2000만원을 쾌척했다. 이런 할머니의 선행이 지역 언론에 대서특필된 덕분에 시내에 나가면 얼굴을 알아보며 인사를 건네는 주민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김 할머니는 지난해부터 한 노인전문병원에 머물고 있는데, 병원 안에서도 '특급환자' 대우를 받고 있다. 2인용 병실을 혼자 쓰고 24시간 간병인을 옆에 두고 있다. 매일 아침 원장이 할머니의 문진을 오지만 병원비 부담은 거의 없다.

하얗게 센 곱슬머리. 왼쪽 귀에 보청기. 그렇게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김 할머니는 흰 바탕에 캐릭터가 그려진 앙증맞은 양말을 신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머리 맡 탁자에는 화초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애지중지하는 화분이란다.
중국과 필리핀으로 끌려가 '후미코'라는 이름으로 7년간 겪은 '그 일' 지금은 누구보다 '인복'이 많지만 젊은 시절 김 할머니는 무엇보다 '사람'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삼남매 중 맏이로 집안의 가장 역할을 했던 할머니가 22살에 위안소로 끌려간 건 그물공장에서 일할 때 만난 아저씨 때문이었다. 어느 날 그는 "돈 많이 버는 공장에 취직시켜 주겠다"며 할머니의 손을 끌고 부산으로 데려갔다. 그 후 김 할머니는 중국과 필리핀에서 후미코라는 이름으로 7년간 고초를 겪었다. 해방 후에는 고향인 경남 고성에서 인민군 밥을 해주기도 했다. '빨치산'의 서슬이 퍼랬던 시절이었다. "우리도 살라꼬 그랬다. 밥 안 해주면 총살당하게 생겼는데 그럼 우짜겠나." 가까스로 고향에 돌아왔지만 29살 때 자신보다 열다섯 살이 많은 남자의 집에서 첩으로 살며 본처의 막내아들을 돌봐야 했다. 두 번의 유산까지 겪은 김 할머니는 알코올 중독자인 남편의 폭행과 구박에 시달렸다. "애초에 기대하고 꾸린 가정은 아니었지만 고통스럽고 지독하게 힘들었다(김복득 할머니 일대기 '나를 잊지 마세요' 中)." 해방 59주년을 맞아 2004년 8월11일 서울 종로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8.15 특별수요시위’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10여명과 시민들이 참석했다. (사진=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 함께하는 통영거제시민모임 제공) 남편이 세상을 뜨고 나서야 할머니의 삶에 볕이 들기 시작했다. 김 할머니는 2003년 광복절을 맞아 열린 특별 수요집회에 참여한 이후 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 운동에 나섰다. 국내외 행사에서 여러 차례 증언을 한 할머니는 지금도 방송국 등 언론 인터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날도 병실 침대에 앉아있던 할머니는 사진기자가 연신 셔터를 눌러대도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짝에서 찍어라", "꽃도 같이 찍으라"며 코치를 했다. 송도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와 함께하는 통영거제시민모임' 대표가 "할머니는 사진발이 워낙 잘 받아서 아무 각도에서 찍어도 잘 나온다"며 농을 건네자 할머니가 받아친다. "신문에 얼굴 나오는 것보다 역사를 모르는 것이 더 부끄러운 기다."

통영에서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한 8명의 할머니 중 남은 사람은 이제 김 할머니뿐. 동병상련을 느꼈던 동생들과 함께 나들이 다니고 노래방에서 회포를 풀던 일은 이제 아련한 추억이 됐다. "동생들이 하나씩 떠났단 소식 들으면 기분 안 좋제. 우리 동생들 있었으면 장난도 치고 했을 낀데. 나는 어쩌다가 아직 살아있나 싶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병실 스피커에서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 주위를 둘러보세요"라는 가사의 음악이 흘러 나왔다. "체조하라고 틀어 주는 거야." 흥겨운 리듬에 맞춰 할머니가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요새 춤은 춤도 아니다. 촌놈 춤이다"며 말하는 할머니에 좌중이 '와'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송 대표는 "다른 할머니들이 많이 살아계실 때 함께 온천 가고 사찰 다녀와서 노래방은 필수 코스였어요. 우리 할머니가 장구도 잘치고 노래, 춤에 능하세요"라고 귀띔했다. 지난해 집 안에서 빨래를 널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어깨 골절상을 입은 이후론 어깨 들썩이는 것도 힘에 부친다. 젊었을 적 사람들에게 그렇게 치이고도 사람을 좋아하는 기질은 그대로여서 옆 병실에 누워있는 환자 동향까지 줄줄 꿰고 있었다. 이날도 송 대표를 보자마자 "아버지 건강은 좀 어떠냐"며 송 대표 아버지의 안부부터 물었다.
인터뷰 도중 병실 스피커를 통해 흥겨운 노래가 흘러나오자 김복득 할머니가 어깨춤을 추고 있다. 할머니는 ‘요즘 춤은 춤도 아니다’며 한마디 덧붙인다. 김복득 할머니 어깨춤 사람에 치를 떨었지만... 그래도 사람이 그립다
할머니가 쓰고 있는 구형 휴대폰 뒷면엔 1, 2, 3, 4, 8이라는 숫자 옆에 지인들의 이름이 함께 적혀있었다. 비상 연락망인 셈이다. 단축번호 1번은 거제에 사는 조카의 전화번호다. 할머니와 자주 왕래하진 못한단다. 유일한 혈육이었던 남동생은 몇 년 전 지병으로 사망 했다.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병실을 나서는데 할머니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배웅을 나왔다. "나오지 마시라"고 말려도 기어코 지팡이를 짚고 따라 나왔다. 손녀딸 같은 마음이었는지 기자의 손을 잡으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할머니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유리문 너머로 손을 흔들었다. 김복득 할머니가 기자 일행을 배웅하고 있다. 엘리베이터가 닫히는 순간까지도 할머니는 연신 손을 흔들었다.
김 할머니뿐 아니라 취재에 응한 대부분의 할머니들은 사람 만나는 걸 반가워하고 헤어지는 걸 아쉬워했다. 사람에 치를 떨었지만 그래도 사람을 그리워하는 할머니들. 그런데 이런 할머니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주변인들이 있어 안타깝게 하는 경우도 있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들 사연을 들여다보면 말도 못해요. 정부 특별지원금 나오니까 싹 가져가 버린 친척들부터, 매달 지급되는 정부 지원금이 할머니에게 가지 못하고 자녀들 주머니로 들어가기고 하고. 그런데 일일이 할머니의 통장 정리까지 해줄 수는 없으니까…." 사람이 준 뼈아픈 경험 탓에 불신도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12년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돌봐온 지방의 또 다른 자원봉사자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얼굴도 안 쳐다보고 밥도 돌아앉아 먹을 정도로 다른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강했어요. 우리가 하는 말을 절대 따르지 않을 만큼 보통 할머니들에 비해 자기 주장도 세고 의심도 많았죠. 때론 속상하다가도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저러실까' 싶어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김복득 할머니가 기자 일행을 배웅하기 위해 지팡이를 짚고 병실을 나서고 있다. 할머니들의 가족 환경에 대해 한 시민 활동가는 "가정을 꾸린다고 해도 자녀들을 교육시킬 여건이 제대로 뒷받침되지 않아 가난이 대물림되는 2차 피해가 생겼다"며 "할머니들은 '내가 죄인이다'라는 죄책감 때문에 자신이 길러준 자녀들에게 목소리를 내지 못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사람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이 할머니들이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활동가들은 말한다. 원종선 나눔의집 간호사는 "10년 전 나눔의집에서 생활하다가 일반 요양병원으로 거처를 옮긴 할머니가 있었는데, 자신의 과거 경험을 알아주는 이도 없고 고립감이 커진 탓인지 실어증에 걸린 사례도 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나눔의집 할머니들을 직접 찾아뵙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시민들의 관심과 사랑이 할머니들의 정서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며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장 탁월한 치료법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prev - 위안부, 어제와 오늘 next - 한.일 정부, 그간 뭐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