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입은 무표정한 소녀. 이 소녀를 감싸듯 드리워진 가지에 채 피지 못한 꽃봉오리. 아직 치유되지 못한 소녀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작품 속 소녀의 얼굴엔 일본군 '위안부'로 고초를 겪어야 했던 한(恨)과 고통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이 작품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순덕 할머니가 1995년 그린 '못다 핀 꽃'이다. 김 할머니는 꽃이 수놓아진 버려진 병풍 위에 열대여섯 살 시절의 자신을 그려 넣었다. '소녀'는 끝내 일본의 사과를 받지 못하고 2004년 눈을 감았다. 국제사회에 일본군의 성적 수탈을 알린 상징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 미국, 캐나나 등에서 전시됐다. 지난달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위안부 할머니들이 준 선물도 바로 이 작품이다.
세 번째 카테고리인 '소녀'들의 꿈에선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직접 그린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심리치료의 일환으로 진행된 미술수업에서 할머니들은 아픔의 증거이자 역사의 한 장면을 고스란히 화폭으로 옮겼다.
특히 할머니들은 고향에서 강제로 끌려가던 '그날'의 모습을 주로 그렸다. 김복동(88) 할머니는 '끌려가는 날'이라는 작품을 통해 총을 든 누런 군복의 일본군에게 이끌려 길을 재촉당하는 14세 소녀를 표현했다. 김순덕 할머니도 한 남자에게 잡힌 손에 이끌려 바다를 날듯 건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15살 때 여자 근로정신대로 일본 비행기 공장에 끌려갔다가 위안부 피해를 당한 고(故) 강덕경 할머니는 숨길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모습을 표현했다. 강 할머니의 '빼앗긴 순정'에는 꽃잎이 떨어지는 나무 아래 발가벗은 채 얼굴을 가린 소녀와 손을 내밀고 있는 일본군, 그리고 널브러진 수십개의 해골이 그려져 있다. 김 할머니는 이에 그치지 않고 그림을 통해 일본군의 처벌을 요구하기도 했다. 강 할머니의 작품 '책임자를 처벌하라'에는 눈 가린 채 나무에 묶인 한 일본군을 권총으로 겨냥하고 있고 있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칼을 든 소녀가 찌른 일장기 밑으로 붉은 피가 떨어지고 있다.
할머니들의 작품들은 실상 고발과 치유를 넘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대중에게 더 쉽게 알리는 역할도 하고 있다. 고(故) 심달연•김순악 할머니들의 압화 작품은 티셔츠, 필통, 손가방 등에 새겨져 대중을 만나고 있다.
주상돈 기자 don@asiae.co.kr